“잠시일 줄 알았던 이별이 평생으로” 일상 속 관심·예우 당부
[애플온뉴스 철원=이성애 기자] “잠시일 줄 알았던 이별이 평생의 그리움으로 남을 줄이야. 아직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24일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백마고지 전망대에 오른 6·25 참전유공자 심구섭(95·노원)씨는 어머니와의 이별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끝나도 가족을 향한 그리움은 끝나지 않았다. 청년들과 함께한 가을 나들이 길에서 꺼낸 그의 이야기는 전쟁이 남긴 아픔을 전했다.
함께 자리한 송진호 노원구지회장은 “좋은 추억을 만들어줘서 오늘 하루 많이 행복했다”라며 고마움을 나타냈다. 이날 철원에서는 오랜 이별의 슬픔과 모처럼의 외출이 안겨준 기쁨이 교차했다.
'나라사랑 평화나눔, 영웅담'그날의 영웅, 오늘의 소풍 이라는 이름으로 마련된 나들이에는 참전유공자 30여명과 청년 봉사자 30여명, 진행 인력 25명 등 모두 85명이 참여했다. 청년들은 참전유공자들과 일대일로 짝을 이뤄 백마고지 전망대와 노동당사, 철원역사문화공원을 둘러봤다.
◆팔짱 끼고 휠체어 밀며, 세대를 잇는 동행
참전유공자들이 탄 차량이 도착하자 먼저 기다리던 청년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했다. 차량에서 내리는 어르신을 맞이하고 걸음을 살피는 것으로 이날의 동행이 시작됐다.
참가자들은 잠시 묵념하며 전쟁 희생자들을 기렸다. 이어 전망대로 향하는 길에서는 청년과 어르신이 나란히 팔짱을 끼거나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이동했다. 서로의 보폭에 맞춰 걷는 길 위에서 전쟁을 겪은 세대와 기록으로 배운 세대가 만났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길을 따라 오른 참전유공자들은 기념비 앞에서 사진을 남겼다. 청년들은 곁에서 이동을 돕고 함께 카메라를 바라봤다. 전쟁의 기억이 담긴 장소가 이날만큼은 새로운 추억을 남기는 공간이 됐다.
전시물을 둘러보던 한 참전유공자는 당시 사용했던 총 사진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그는 총이 무척 무거웠다고 말하며 군 생활을 회상했다. 청년들에게는 전시물 속 무기였지만, 그에게는 직접 짊어지고 견뎌야 했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이날 현장 안내를 맡은 이주연(40대·구리)씨는 백마고지 전투의 배경과 군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치열한 공방전과 희생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참가자들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담긴 역사를 되짚었다.
전망대에서 만난 주민 박민수(가명·70대)씨는 민북마을 초기 정착민들이 지뢰 위험 속에서 땅을 개간했던 과정과 이후의 토지 분쟁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의 설명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접경지역 주민들의 삶에 남은 어려움을 돌아보게 했다. 박씨는 청년들이 현장을 찾아 전쟁과 분단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충성!” 외치며 기념사진 웃음 사이 꺼낸 당부
총탄 흔적이 남은 노동당사 앞에서는 참전유공자들의 기념촬영이 이어졌다. 카메라를 향해 '충성!'을 외치며 자세를 잡는가 하면 허리춤에 손을 얹고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추억을 남기는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전쟁의 상흔이 남은 건물 앞에서 터진 웃음은 나들이의 분위기를 한층 밝게 했다. 청년들은 사진을 찍고 어르신들의 이동을 도우며 곁을 지켰다. 역사 현장을 둘러보는 일정 속에 세대가 함께 웃는 시간이 더해졌다.
이날 동행한 정민준(30대)씨는 참전유공자들과 전쟁의 흔적이 남은 현장을 둘러보며 이들의 희생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특히 인력거에 모신 어르신이 즐거워하던 모습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았다.
정씨는 참전유공자들의 희생이 오늘의 삶을 있게 했다는 점을 되새겼다며 앞으로도 그 마음을 기억하며 봉사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참전유공자들이 청년들에게 전한 말에는 감사와 함께 당부도 담겼다. 송진호 지회장은 중학생 때 전쟁을 겪고 경찰 근무를 거쳐 군에 입대해 후방에서 복무했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는 “젊은 세대가 6·25전쟁의 참혹함과 참전유공자들의 희생을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이어 “나라를 지키다 숨진 이들이 오늘의 발전한 대한민국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깝다”며 먼저 떠난 이들을 떠올렸다.
송 지회장은 청년들이 당시 상황을 이해하고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안보의식을 가져 달라고 요청했다. 참전유공자를 향한 감사도 보훈의 달에 그치지 않고 일상 속 관심과 존중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대우해주니 힘이 나” 기념일 넘어 일상의 예우로
유영우(92·상계동) 참전유공자에게 철원은 젊은 시절 근무했던 곳이다. 다시 찾은 풍경 앞에서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 2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군에 들어갔던 사연을 꺼냈다.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입대했지만 군 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부족한 먹을거리와 쉽게 해지는 무명옷, 겨울 추위를 막기 어려운 막사에서 버텨야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생계를 위해 군에 남아 직업군인으로 복무했다.
유씨는 “그때 생각도 나고 감회가 새롭다&며 &봉사자들이 우리를 대우해주니 사기가 충전되고 아주 감사하다”고 말했다.
발전한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면서도 참전유공자 예우에는 아쉬움을 전했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던 경험을 젊은 세대와 나눌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날 청년들의 환대가 반가웠던 이유이기도 했다.
행사 준비를 맡은 박인석씨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어르신들께 감사와 존경을 전하고자 이번 나들이를 준비했다”며 “어르신들이 편안하게 즐기시고 좋은 추억을 간직하신다면 더없이 기쁘겠다”고 말했다.
이어 “청년들이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그 희생과 평화의 소중함을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일상에서 어르신들을 살피는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이날 청년들이 건넨 것은 환영의 박수만이 아니었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에서 내어준 팔과 휠체어를 미는 손, 오래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었다. 참전유공자들은 그 곁에서 전쟁의 기억을 꺼내고, 함께 웃으며 오늘의 사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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