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죄 판단 아닌 생명·건강 고려한 인도적 결정 요청”
[애플온뉴스=이성애 기자] “참전용사라고 해서 죄를 덮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7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
6·25전쟁을 겪은 노병들이 다시 한자리에 섰다. 이번에 이들이 마주한 것은 전쟁터가 아니라 법원이었다.
단복을 입고 가슴에 훈장을 단 고령의 참전유공자들 가운데는 휠체어를 타거나 보행보조기에 몸을 의지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이 법원 앞에 모인 이유는 6·25 참전유공자인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이만희 총회장의 병보석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6·25참전유공자회 관계자와 회원 등 30여명이 참석했다. 주최 측은 이 총회장이 96세의 초고령 참전유공자라는 점을 들어 재판부가 건강과 생명을 고려해 병보석을 허가해 달라고 촉구했다.
현장에서 반복된 말은 ‘무죄’가 아니라 ‘살아서 재판받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참석자들은 이 총회장의 유·무죄를 자신들이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며 재판부의 독립적인 판단 역시 존중한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초고령 피고인의 건강이 악화될 가능성을 고려해 구금 상태에서 재판을 계속해야 하는지 살펴봐 달라는 요구였다.
◆ 휠체어·지팡이 짚고 법원 앞으로
이날 현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발언 내용보다 참석자들의 모습이었다.
휠체어에 몸을 맡긴 참전용사가 있었고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이들도 있었다. 고령의 몸으로 법원 앞에 선 이들은 자신들의 노년을 통해 이 총회장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김봉권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본부이사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노병에게 하루하루가 어떤 의미인지를 언급하며 병보석 필요성을 호소했다.
김 이사는 “그 참혹한 사선을 함께 넘었던 96세 노병이 차디찬 구치소 독방에 갇혀 있다”며 “구치소가 아니라 병보석을 허가해 최소한의 치료를 받으면서 살아서 법정에 서고 끝까지 재판을 마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했다.
그의 요구는 재판을 멈춰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재판을 끝까지 받을 수 있도록 생명을 지켜 달라는 데 방점이 찍혔다.
참석자들이 주장하는 핵심도 여기에 있었다. 초고령 피고인을 석방한다고 해서 재판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 만큼 구속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형사재판을 계속하는 문제를 분리해서 판단해 달라는 것이다.
◆ “이 글씨를 읽을 수 없습니다”
이어 발언에 나선 최은석 송파구지회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위해 직접 발언문을 준비해 왔다.
그러나 발언문을 손에 들고도 쉽게 읽지 못했다.
99세라고 자신을 소개한 최 지회장은 전날 안경점에서 돋보기까지 맞췄지만 준비해 온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참전용사들이 고령이 된 지금 법원 앞에서 또 다른 노병의 생명을 지켜 달라고 호소해야 하는 현실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부산과 대구만을 남겨놓고 전부 적화됐을 때 목숨 바치고 젊음을 바쳐 나라를 지켰습니다.”
최 지회장은 이 총회장에 대한 재판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판결이 나올 때까지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취지의 호소를 이어갔다.
준비한 글을 제대로 읽기 어려워하는 모습은 이날 기자회견의 성격을 역설적으로 보여줬다.
병보석을 요구하기 위해 법원 앞에 나온 사람들 역시 아침에 일어나고, 걷고, 글을 읽는 일 하나하나가 예전 같지 않은 초고령 세대였다.
◆ “죄를 덮어달라는 게 아니다”
이용복 인천시지부 고문은 구금 상태에서 초고령자에게 응급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는 구치소의 의료환경으로 초고령자의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한밤중 숨이 가빠지거나 위급상황이 발생한다면 골든타임을 어떻게 지킬 것이냐”는 취지로 말했다.
그러면서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저희는 참전용사라고 해서 무조건 죄를 덮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병보석이 곧 무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건강을 유지하면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 자신들의 요구라는 설명이다.
다른 참석자들도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지켜야 할 가치 가운데 하나로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들었다.
최영식 용산구지회장은 자신 역시 지팡이 없이는 걷기가 쉽지 않다며 고령의 몸으로 법원 앞까지 나온 이유를 설명했다.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피고인의 건강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참전용사들의 발언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6·25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기억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대부분 ‘국가가 이제는 노병의 생명을 지켜 달라’는 요청으로 끝났다.
◆ 병보석 판단, 결국 재판부 몫
이날 참석자들은 결의문을 통해 ▲생명과 건강을 고려한 병보석 허가 ▲초고령 참전유공자의 인간적 존엄 보호 ▲신속한 보석 결정 등을 재판부에 요구했다.
“병보석을 허가하라.” “마지막 인간 존엄을 지켜달라.” “시간이 얼마 없다. 신속하게 결정하라.” 참석자들의 구호가 서울중앙지법 앞에 이어졌다.
그러나 병보석 허가 여부는 기자회견 참석자들의 요구만으로 결정되는 사안은 아니다. 형사재판에서 구속 필요성과 보석 여부는 피고인의 건강 상태뿐 아니라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 재판 진행 상황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해 법원이 판단한다.
따라서 이날 기자회견이 던진 쟁점은 이 총회장의 유·무죄와는 별개다.
96세 초고령 피고인의 건강과 생명 보호를 위해 구속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도 재판을 계속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참전용사들은 이 총회장이 초고령이고 거동과 건강에 어려움이 있는 만큼 도주나 증거인멸 가능성이 낮다는 취지로 주장하며 재판부의 인도적 판단을 요청했다.
이날 법원 앞에 선 노병들 역시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였다. 휠체어를 타고, 지팡이를 짚고, 준비해 온 글조차 제대로 읽기 어려운 몸으로 이들은 법원까지 나왔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켜낸 나라의 사법부를 향해 한 가지를 요구했다.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법대로 판단해 달라. 다만 그 판단을 받을 때까지 살아 있게 해 달라.”
이날 기자회견의 메시지는 결국 그 한마디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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